제12화물살
"서른."
지하 1층을 떠난 뒤로 그 목소리는 다시 들리지 않았다. 들리지 않으니까 더 신경이 쓰였다. 나는 계단을 내려가다가도, 돌을 밀다가도, 큐브를 씹다가도 뒤를 돌아봤다. 돌아보면 늘 어둠뿐이었다.
지하 2층 계단 끝에는 흙이 쌓여 있었다. 돌 사이마다 가느다란 줄기가 눕듯 뻗어 있었다. 빈 바닥인 줄 알고 디딘 자리가 들썩이더니 발목에 감겼다. 풀이었다. 땅속에 무슨 풀이 자라나 싶었는데, 자라 있었다. 한 발 뗄 때마다 줄기가 발목을 붙잡았고, 몇 걸음 못 가서 속이 메슥거렸다. 파란 애는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손목에 적었다. 풀: 감김. 느려짐. 울렁.
"걸으면서 적어."
"걸으면서 적으면 글씨가 울렁거려요."
그 층의 돌은 전부 밀어서 치웠다. 미는 건 공짜다. 기억이 사라지지 않는다. 대신 새 조각도 없다. 그래도 돌 하나를 제자리에 밀어 넣을 때마다, 머릿속에 들어와 있던 것들이 한 칸씩 줄을 맞춰 서는 느낌이 들었다. 지하 1층에서 처음 밀었을 때처럼.
한 층 더 내려가자 천장이 낮아졌다. 처음에는 헬멧만 스쳤는데, 안쪽으로 갈수록 등까지 닿았다. 돌아갈 틈은 없었다. 허리를 굽히다가 결국 기었다. T956은 폭탄을 먼저 굴리고, 그만큼 무릎으로 따라왔다. 앞장선 건 파란 애였다. 쟤가 지나가는 자리마다 낮은 천장이 파랗게 물들었다가 천천히 식었다. 뒤에서 보고 있으니 빛나는 벌레 한 마리가 굴을 파고 가는 것 같았다.
참으려고 했는데 입이 먼저 나갔다.
"야. 너 벌레 같아."
"벌레 좋아요. 다리가 많잖아요."
칭찬으로 들은 모양이었다.
지하 4층은 바닥이 뜨거웠다. 갈라진 틈이 먼저 붉어지고, 조금 뒤 불이 솟았다가 가라앉았다. 나는 불이 꺼진 자리가 아니라 금이 없는 돌판 위로 발을 옮겼다. 뒤의 둘도 내 발 놓는 자리를 봤다. 파란 애가 제일 먼저 손끝을 데었고, 제일 먼저 적었다. 불: 뜨거움. 틈 밟지 말 것.
T956은 그 글씨를 읽으려고 파란 애 손목을 들여다보며 걷다가 틈을 밟았다. 두 번이나. 틈 밟지 말라는 글을 읽느라고.
계단 앞은 돌 하나가 막고 있었다. 금이 한 줄 나 있었다. 나는 금 끝을 찾아 망치로 톡, 건드렸다. 작게.
돌이 갈라지면서 무언가가 들어왔다. 이번에는 소리였다. 얇은 것이 이 사이에서 바삭, 하고 부서지는 소리.
"이름 조각이 새겨졌습니다. 이름을 부르기까지 27층 남음."
작게 쳤으니 기억도 조금만 사라졌을 거다. 나는 손가락을 하나씩 접었다. 큐브 짬. 너 T956. 쟤 T999. 파랑. 나 37. 다섯 개가 다 접혔다. 됐다.
지하 5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에서 나는 또 뒤를 돌아봤다. 여섯 번째였다. 여섯 번 다 아무도 없었다.
일곱 번째로 고개를 돌리는데 T956이 말했다.
"아무도 없어요."
"알아."
"그럼 왜 봐요."
"없는 거 확인하려고."
그러고도 나는 한 번 더 봤다. 우리 등 뒤에 대고 서른, 하고 셌던 놈. 그놈이 저 어둠 어딘가에서 아직 우리를 세고 있을 것 같았다.
그때 계단 아래에서 철컥, 소리가 났다.
누가 쇠를 당겼다 놓는 소리. 철컥. 한참 있다가 또 철컥. 간격이 일정했다.
나는 망치를 고쳐 쥐었다. 세는 놈이 뒤가 아니라 앞에 있었나 보다, 했다.
계단 끝에서 발이 물에 잠겼다.
지하 5층은 방 전체가 물이었다. 무릎까지 차는 물이 왼쪽 벽에서 오른쪽 벽으로 쉬지 않고 흘러갔다. 나는 계단을 짚고 한 발을 내디뎠다. 바닥이 미끄러웠다. 발을 옮기려고 들자 물살이 정강이를 옆으로 밀었다. 빈손으로도 짚을 곳을 찾으며 가야 했다. 폭탄을 안고 저 끝까지 건너기는 어려워 보였다.
지하 6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은 방 반대편 끝에 있었다. 왼쪽 벽의 낮은 틈에서 들어온 물이, 우리가 가야 할 길을 옆으로 가로질러 오른쪽 벽 틈으로 빠졌다. 가장자리를 돌아가 보려 했지만 계단 옆 턱은 벽에서 끊겼다. 물을 건너야 했다.
그리고 그 물 한가운데에 사람이 있었다.
늙은 여자였다. 젖은 천 옷이 몸에 달라붙어 있었다. 표면에서 본 사람들과 같은 옷이었다.
세는 놈은 아니었다. 여자는 말이 없었다. 우리 쪽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여자는 물속에 잠긴 넓적한 돌에 두 손을 대고 있었다. 윗면만 간신히 수면에 닿았다. 한쪽 발은 바닥 돌의 벌어진 틈에 끼우고, 다른 발은 뒤로 벌려 버텼다. 몸을 낮춰 돌을 조금 밀고 나면, 손을 짚은 채 발 디딜 곳부터 더듬었다. 한 번에 반 걸음쯤밖에 움직이지 못했다. 돌은 물이 밀 때마다 바닥에서 조금씩 들썩였다. 여자가 손을 놓자 밑의 그림자가 벌어졌다가, 물살을 타고 옆으로 미끄러졌다.
한참 보고 나서야 뭘 하는지 알았다. 징검다리였다. 이쪽 계단에서 저쪽 계단까지 돌 아홉 개를 한 줄로 놓으려는 거였다.
여자는 돌을 세 개쯤 밀어 놓으면, 돌마다 손을 옮겨 짚으며 벽으로 갔다. 벽에 붙어서야 허리를 펴고 쇠 손잡이를 당겼다. 철컥. 오른쪽 벽 아래가 벌어졌다. 물이 그쪽으로 낮아지면서 돌이 바닥에 털썩 내려앉았다. 그 틈에 여자는 다시 돌 쪽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물은 금방 다시 찼다. 물이 차면 물살이 돌아왔고, 물살은 제일 먼저 놓은 돌부터 밀어냈다. 첫째 돌이 한 칸 밀려 줄에서 빠지고, 조금 있다가 둘째 돌이 빠졌다.
여자가 아홉째 돌을 놓을 즈음이면 첫째 돌은 늘 떠내려가 있었다. 다리는 끝까지 이어지는 법이 없었다.
그러면 여자는 첫째 돌이 있던 자리로 돌아가서 처음부터 다시 밀었다. 아무렇지 않게. 몸이 먼저 아는 순서처럼.
"몇 번째일까요."
파란 애가 물었다.
"몰라. 백 번? 천 번?"
"세어 볼까요?"
"하지 마. 우울해져."
T956이 폭탄을 계단 옆 마른 턱에 내려놓았다. 우리도 여자가 디디던 곳을 찾아 물에 들어갔다. 돌에 손을 짚고 한 발씩 옮겼다. 넷이 하면 빠를 테니까.
여자가 미는 순서는 한 번 보니까 외워졌다. 어느 돌을 어느 쪽으로 몇 칸, 몇 개째에 철컥. 셈은 내 거다. 내가 순서를 부르면서 우리 셋이 밀었다. 여자는 우리가 있든 말든 자기 순서대로 밀었는데, 순서가 같으니까 부딪치지는 않았다.
빨라지긴 했다. 그래도 물살이 이겼다. 마지막 두 개를 놓는 동안 첫째 돌이 밀려났다. 두 번째 해도. 세 번째 해도.
세 번째에는 T956이 밀려나는 돌을 잡으려다 발 디딘 틈에서 미끄러졌다. 붙잡은 돌까지 움직이자 몸이 옆으로 넘어졌다. 물살에 밀려가다가 다음 돌을 양팔로 붙잡고 겨우 멈췄다. 물에서 기어 나와서 한마디도 안 했는데, 원래 표정이 없는 애가 표정이 더 없어졌다.
나는 계단에 주저앉아 셌다. 셀 게 많으면 머리가 식는다.
"다리가 너무 길어. 끝까지 놓기 전에 앞이 밀려."
"그럼 앞을 붙잡아 두면 돼요?"
"붙잡고 있을 때는 버텨도, 마지막에 그 사람이 손 놓고 올라오면 다시 밀리잖아."
T956이 방금 자기가 떠내려간 자리를 봤다.
방 구석, 물이 닿지 않는 턱 위에 하얀 돌이 하나 있었다. 표면에 서리가 끼어 있었다.
T956이 물에서 기어 나올 때 그 턱을 짚었다. 하얀 돌에 닿은 손가락부터 서리가 번져, 주먹이 반쯤 쥐어진 채 펴지지 않았다. 손을 떼고 기다리자 서리가 녹았다. T956이 손가락을 하나씩 움직여 봤다. 파란 애는 그새 적어 뒀다. 하얀 돌: 만지면 언다. 조금 뒤에 풀림.
나는 하얀 돌을 봤다. 물을 봤다. 또 떠밀려 가는 첫째 돌을 봤다.
"야. 저거."
"만지면 얼어요."
"알아. 그러니까."
나는 벌떡 일어났다. 신이 났다. 이런 거 좋다.
"저거 물에 밀어 넣으면, 물이 얼 거 아냐."
T956이 나를 봤다. 파란 애도. 여자만 안 봤다. 여자는 돌을 밀고 있었다.
"첫째 돌 옆에 저걸 빠뜨리는 거야. 그럼 거기부터 물이 얼어. 물살은 얼음에 막히고, 앞쪽 돌들은 얼음에 붙어서 안 밀려."
"밀면 저희도 얼어요."
"잠깐이잖아. 번갈아 밀면 돼. 하나가 굳으면 다음 사람이 밀고, 그동안 먼저 굳은 사람이 풀리고."
파란 애가 자기 손목을 내려다봤다. 조금 뒤에 풀림.
"……해 봐요."
해 봤다.
T956이 먼저 하얀 돌에 어깨를 댔다. 돌이 조금 움직이자, 닿아 있던 어깨와 팔에 서리가 번졌다. T956은 얼지 않은 손으로 돌을 밀어 몸을 떼고 옆으로 비켰다. 한쪽 팔은 들린 채 내려오지 않았다.
두 번째는 나였다. 팔이 굳었다. 차가운 게 뼈까지 파고들었다.
세 번째는 파란 애. 어깨로 돌을 밀다가 서리가 목까지 올라오자 얼른 물러났다.
"차가워요. 어깨도 얼어요. 적어야겠어요."
네 번째 차례가 돌아올 즈음 T956이 풀렸다. 다시 밀었다.
벽을 따라 이어진 마른 턱 위로 돌을 밀었다. 팔이 굳기 시작하면 몸을 떼고 비켜섰다. 다음 사람이 그 자리에 들어가 밀었다. 턱이 끝나는 곳 바로 아래가 첫째 징검돌이었다. 마지막으로 셋이 몸을 기대자 하얀 돌이 턱 밖으로 기울었다.
하얀 돌이 물에 빠졌다.
쩍, 하는 소리가 났다. 돌 둘레의 물이 하얗게 번지더니, 번진 자리부터 굳어 갔다. 물살이 얼음에 부딪혀 양쪽으로 갈라졌다. 얼음은 첫째, 둘째, 셋째 돌을 차례로 붙잡으며 뻗어 나갔다.
"지금이에요! 순서 불러요!"
파란 애가 소리쳤다. 쟤가 소리치는 건 처음 들었다.
나는 불렀다. 넷째 돌 오른쪽으로 두 칸. 다섯째 앞으로. 여섯째. 철컥.
여자가 우리 옆에서 같이 밀었다. 순서가 똑같으니까, 우리가 여자를 따라가는 건지 여자가 우리를 따라오는 건지 모르게 됐다.
일곱째. 여덟째. 아홉째.
철컥.
첫째 돌에서 시작된 얼음이 돌 사이의 좁은 틈을 메우며 뻗어 왔다. 아홉째 돌 옆에도 얇은 얼음이 붙었다.
물이 다시 차올랐다. 물살이 돌아왔지만, 이제 돌들은 얼음으로 서로 이어져 있었다. 다리 양옆으로 물이 흘렀고, 첫째 돌도 마지막 돌도 움직이지 않았다.
여자가 허리를 폈다.
다리를 봤다. 끊어지지 않은 다리를. 한참.
그러고는 첫째 돌로 돌아가지 않았다. 다리 위로 올라섰다. 한 칸, 두 칸. 천천히.
T956은 계단 옆에 두었던 폭탄을 가지러 갔다. 나는 여자 뒤를 따라 건넜다. 발밑이 단단했다. 이 다리를 끝까지 건넌 게 몇 번째인지는 세지 않았다. 여자가 첫 번째일 거다.
그런데 다리 끝에서 막혔다.
커다란 검은 돌 하나가 지하 6층으로 가는 계단 입구를 틀어막고 있었다. 아홉째 돌 바로 앞이었다. 금이 하나도 없는 돌이었다. 망치로 쳐 봤다. 튕겼다. 세 번 다.
파란 애가 주머니에서 오른손을 꺼내려 했다. 나는 그 손목을 붙잡았다. 너는 아껴. 지하 1층에서 한 말을 또 했다.
그럼 폭탄이다.
나는 다리 위의 돌을 뒤에서부터 셌다. 폭탄은 발밑에 두면 두 칸 앞에서 터지고, 거기서 사방으로 한 칸씩 더 번진다. 막는 돌에서 두 칸 물러나면 여덟째 돌이다. 거기서 터뜨리면 막는 돌은 깨진다. 대신 그 앞에 붙은 아홉째 돌도 같이 날아간다.
다리 끝 한 칸이 없어지는 거다.
T956이 나를 봤다. 나는 다리를 봤다. 방금 여자가 처음으로 끝까지 건넌 다리.
"날려."
내가 말했다.
"한 칸이면 물 밟고 건너면 돼. 넷이 붙잡고. 계단 앞은 물살도 약해."
T956은 폭탄을 든 채로 여자를 봤다. 여자는 여덟째 돌 위에 서서, 막힌 계단만 보고 있었다.
"……이 사람 다리인데요."
"이 사람은 다리를 놓고 싶었던 게 아니야. 건너가고 싶었던 거지."
T956은 한참 여자를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여덟째 돌에 선 T956의 발을 보고 손가락으로 앞의 두 자리를 짚었다. 아홉째 돌, 그다음 검은 돌. T956이 검은 돌을 향해 몸을 돌렸다.
우리는 일곱째 돌 뒤로 물러났다. 파란 애가 여자의 손을 잡고 데려왔다. 여자는 순순히 따라왔다.
T956 혼자 여덟째 돌 위에 남았다. 폭탄을 발밑에 내려놓고 손을 얹었다. 그리고 기다렸다. 이번에는 아무도 T956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여자도 가만히 있었다. 물소리만 났다.
"와요."
T956이 손을 뗐다.
검은 돌이 가루가 됐다. 아홉째 돌도 같이. 가루는 물살에 실려 오른쪽 벽으로 흘러갔다. 여자는 그쪽을 돌아보지 않았다.
"이름 조각이 새겨졌습니다. 이름을 부르기까지 26층 남음."
조각이 들어왔다. 이번엔 색이었다. 따뜻한 쪽의 색. 가운데보다 가장자리가 더 진한.
"노릇……."
내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모르는 말이었다.
여자가 나를 봤다. 처음으로.
"……구웠지."
또렷했다. 중간에 끊기지 않았다.
"구웠지. 아침마다. 네모나게."
여자가 웃었다. 이가 몇 개 없었다.
우리는 서로 팔을 붙잡고 물 한 칸을 건넜다. 여자는 파란 애 손을 잡고 건넜다. 계단 첫 칸에 발이 닿자 여자는 우리보다 먼저 내려가기 시작했다. 한 칸 한 칸, 발끝으로 확인하면서.
파란 애가 급하게 손목에 적었다. 셋째 조각: 노릇. 물 할머니: 구웠지. 아침마다. 네모나게.
"네모가 뭐예요?"
"나도 몰라. 빨리 따라가. 할머니 넘어진다."
지하 6층으로 가는 계단 중간에 넓은 공간이 있었다. 할머니는 거기서 벽에 등을 기대고 앉더니 그대로 잠들었다. 숨소리가 편했다. 우리도 거기서 쉬기로 했다.
큐브를 셌다. 서른여섯.
T956이 먹고, 파란 애가 먹고, 내가 먹었다. 서른셋. 가방을 닫았다.
그리고 잤다. 세는 사람도 잤다. 오늘은 좀 자도 될 것 같았다.
깼을 때 가방이 열려 있었다.
셌다. 서른.
다시 셌다. 서른.
"야. 일어나."
둘을 흔들어 깨웠다. 할머니는 그대로 자고 있었다. 손에 아무것도 없었다.
바닥에 물 자국이 나 있었다. 우리가 내려온 계단, 지하 5층 쪽에서부터 이어진 자국이었다. 누가 물을 건너 우리 뒤를 밟아 내려온 거다. 발자국이었다. 가늘었다. 발가락이 전부 뼈처럼 가늘었다.
발자국은 가방 앞에서 멈췄다가, 왔던 계단으로 되돌아갔다.
그 옆 바닥에 긁힌 자국이 있었다. 뾰족한 걸로 급하게 새긴 숫자.
33 → 30
"……셌어."
내가 말했다. 목소리가 이상하게 나왔다.
"가져가면서, 몇 개 남았는지 셌어. 우리 대신."
이 이야기 속 별을 게임에서도 내려갈 수 있습니다.
『Sector31』은 2026년 겨울 출시 예정인 퍼즐 전략 게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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