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Sector31』

제11화분필 자국

지하는 고요했다.

우리 셋의 숨소리 외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T999가 계단 아래로 내려서자 벽이 드러났다. 빛이 닿는 만큼만.

벽에 흰 화살표가 그려져 있었다. 손가락 굵기의 흰 가루. 옆에 작은 글씨.

물 있음. 오른쪽.

"누가 그렸어."

T17이 손끝으로 가루를 문질렀다. 손끝이 하얘졌다.

"복원자는 아니야. 복원자라면 물부터 표시하지는 않았을 거야. 우리는 보급품부터 챙겨 내려오니까."

"그럼 누구요?"

"위에 사람들. 표면."

화살표를 따라 걸었다. 몇 걸음마다 하나씩 있었다.

처음에는 글씨가 또박또박했다. 천장 낮음. 머리 조심. 셋째 방부터 돌. 여기서 쉼, 엄마랑.

조금 더 가자 글씨가 짧아졌다. 왼. 막.

그다음은 화살표만.

그다음은 화살표가 한 자리를 빙빙 돌았다. 선이 겹쳐 두꺼워질 때까지.

그다음은 긁힌 자국.

T17이 더는 읽지 않았다. 읽을 게 없었다.

"……내려가면서 까먹은 거네. 뭘 하러 왔는지."

"그럼 우리도요?"

T999가 물었다. 너무 태연해서 T17이 대답을 못 했다.

첫 방은 돌이 일곱 개였다. 허리 높이의 돌들이 방 가운데를 엇갈려 막고 있었다. 돌 너머로 아래쪽 계단의 윗부분이 보였다가, 우리가 움직이면 다시 가려졌다.

바닥의 네모난 이음매를 따라 긴 홈이 나 있었다. 돌 하나가 딱 한 칸을 차지했다. 돌과 벽 사이에는 사람이 돌아설 자리가 드문드문 남아 있었다. 누군가는 그 빈자리로 돌을 밀며 지나간 모양이었다.

"깰 줄 모르니까 민 거야."

T17이 제일 앞의 돌에 어깨를 댔다. 홈을 따라 밀었다. 돌이 끌려갔다. 바닥 긁는 소리가 방을 채웠다.

T17이 머리를 흔들었다. 그리고 손가락을 하나씩 접으며 중얼거렸다.

"큐브 짰음. 너 T956. 쟤 T999. 파랑. 나 37."

손가락 다섯 개가 다 접혔다. T17이 씩 웃었다.

"기억 안 사라졌어. 밀면 안 사라져."

머릿속 어딘가가 조금 가지런해졌다.

"밀었는데 머리가 편해졌어요."

T999가 말했다. T17도 고개를 끄덕였다. T999는 손목에 적었다. 밀기: 기억 안 사라짐. 정리됨.

"그럼 다 밀자."

T17은 신이 났다. 두 번째 돌을 밀었다. 세 번째를 밀었다. 네 번째를 밀려다 멈췄다. 방금 민 세 번째 돌이 네 번째 돌 앞을 막고 있었다. 벽 모서리에 끼어서 더 밀리지도 않았다.

T17이 세 번째 돌의 윗모서리를 잡아당겼다. 손가락만 미끄러졌다. 반대편으로 돌아가 밀려고 했지만, 돌이 벽 모서리에 붙어 발 하나 넣을 틈도 없었다. 발로 차 봤다. 발이 아팠다.

"……돌은 당기는 게 안 되는구나."

"네. 방금 알았어요."

T999가 적었다. 돌: 당기기 안 됨. T17 발 아픔.

"그건 왜 적어."

"다음에 안 차게요."

그 뒤로 T17은 밀기 전에 셌다. 입술이 바쁘게 움직였다. 한 번 틀린 사람의 셈은 꼼꼼했다.

길을 막아 버린 세 번째 돌은 망치로 깼다. 작게.

속이 빈 돌이었다. 조각은 들어오지 않았다. 그런데 T17이 인상을 썼다.

"빈 걸 깨도 기억 사라지는 건 여기도 똑같네."

망치는 앞의 한 칸만 때리는 물건이 아니다. 정면과 양옆, 세 칸이 같이 맞는다. 그래서 T17은 늘 구석 쪽 금 끝을 골랐다. 옆 돌까지 같이 깨지면 그만큼 기억이 더 사라지니까.

남은 돌은 전부 밀었다.

마지막 돌은 계단 입구에 끼어 있었다. 금이 거미줄처럼 안쪽으로 모여 있었다. 돌 앞에 흰 가루가 흩어져 있었다. 누군가 여기서 화살표를 그리다 그만둔 자국.

표면 사람들은 여기서 멈췄다. 이 돌을 넘지 못해서.

그런데 돌 아래에는 다른 자국도 있었다. 잘게 부서진 조각들이 바닥에 붙어 있었고, 위로 갈수록 틈 없이 엉겨 있었다. T17이 망치 끝으로 밑동을 긁었다. 겉의 가루만 떨어지고, 안쪽은 단단했다.

"전에 누가 깬 거네. 다시 굳었어."

D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먼저 간 사람이 열어 놓은 길도 다시 막힐 수 있다고.

T17이 망치로 세 번 쳤다. 세 번 다 튕겼다. T999가 오른손을 꺼내려 하자 T17이 손목을 잡았다.

"너는 아껴. 너는 기억이 전부 사라지잖아."

나는 두 걸음 물러나 폭탄을 내려놓았다.

손을 얹고 기다리는 동안 T17은 가만히 있지 못했다. 우리가 내려온 계단까지 갔다가 돌아왔다. 벽의 화살표를 셌다. 내 옆에 와서 쪼그려 앉았다.

"아직?"

"네."

"얼마나 남았어?"

"몰라요."

"대충. 반? 반의 반?"

"……T17이 말 걸면 처음부터예요."

T17이 입을 다물었다. 숨 세 번쯤 버티다가 T999한테 가서 작게 떠들었다.

손 아래가 무거워졌다. 돌 속의 무엇이 이쪽을 알아봤다.

"와요."

T17이 T999를 끌고 계단 위로 뛰었다. 나는 손을 뗐다.

돌이 가루가 됐다. 반쯤 그린 화살표가 가루에 덮였다.

그리고 들어왔다. 따뜻한 것. 거기 묻은 냄새. 맡아 본 적 없는데 코가 먼저 한 번 더 들이켜는 냄새.

"이름 조각이 새겨졌습니다."

"이름을 부르기까지 30층 남음."

"냄새 좋다. 이거 뭐야."

T17이 코를 벌름거렸다. T999는 자기 손목에 코를 대 봤다. 거기서 나는 냄새가 아니었다.

계단에 앉아 큐브를 먹었다.

입에 넣었다. 무너졌다. 혀에 무언가 얹혔다.

처음 먹는 맛이었다. 짠 것도 같고 쇠 같기도 한.

나는 손바닥의 검은 부스러기를 봤다. 큐브였다. 매일 먹었다. 그건 알았다. 혀만 몰랐다.

"왜. 맛없어?"

"……이게 무슨 맛이에요?"

T17이 씹다가 멈췄다. 나를 봤다. 큐브를 봤다. 다시 나를 봤다.

"너 방금 큐브 맛을 까먹었어?"

"그런 것 같아요."

"첫 방에서? 조각 하나 받고? 큐브 맛을?"

"네."

T17이 웃음을 참다가 실패했다. 계단에 드러누워 웃었다. 소리가 층 전체에 울렸다.

"축하해. 너 이제 평생 큐브가 새로워. 부럽다 진짜."

"……짜요."

"그래, 짜. 그게 큐브 맛이야. 외워. 짜다."

T17이 자기 큐브를 반 떼어서 내 입에 넣었다.

"한 번 더 처음 먹어 봐."

짰다. 이번에는 짠 줄 알고 먹었다.

T999가 계단 옆 벽에서 무언가를 보고 있었다. 흰 손바닥 자국이었다. 작았다. 우리 손보다.

T999가 파란 왼손을 그 위에 겹쳤다. 손가락 끝이 한 마디씩 남았다.

"아기 손이에요."

그때였다.

위쪽에서 소리가 났다. 우리가 내려온 계단 꼭대기, 어둠 속에서.

사람 목소리였다. 낮고 건조했다.

"……서른."

T17이 웃음을 멈췄다. 몸을 일으켰다. 망치를 쥐었다.

T999가 빛을 위로 들었다. 계단이 스무 칸쯤 보였다. 그 위는 어두웠다. 아무도 없었다.

"야. 방금 너희 중에 누가 셌어?"

나는 고개를 저었다. T999도.

T17은 한참 위를 보고 있었다.

"……우리 말고 누가 층을 세고 있어. 거꾸로."

이 이야기 속 별을 게임에서도 내려갈 수 있습니다.
『Sector31』은 2026년 겨울 출시 예정인 퍼즐 전략 게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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