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화파란 사람
캡슐이 열렸다.
자는 동안 무언가 반복됐고, 눈을 뜨자 잊었다. 늘 그랬다.
큐브는 짰다. T17은 회복실에서 주는 게 덜 짜다고 했다. 나도 거기서 먹었을 텐데, 어떤 맛이었는지는 떠오르지 않았다.
화면이 켜졌다. D였다.
"오늘이에요."
그게 다였다. 생체 점수는 뜨지 않았다.
폭탄은 캡슐 옆 바닥에 있었다. 자는 동안 아무도 치우지 않았다.
들었다. 어제와 같은 무게였다. 무겁다는 걸 아직 알고 있었다.
적어도 어젯밤 T17에게 맡긴 말은 기억났다. 무거웠고, 그게 마음에 들었다는 것.
아래 방에는 T17이 먼저 와 있었다. 망치를 무릎에 올려놓고 앉아 있었다.
"잤어?"
"네."
"난 못 잤어. 아니, 잤어. 캡슐이 재웠어. 그건 잔 게 아니지."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T17은 대답을 기대하지 않는 말을 자주 한다.
계단 쪽이 파래졌다.
조명이 아니었다. 조명은 흰색이다. 벽이, 계단이, 위에서부터 파랗게 물들었다.
T17이 일어났다. 망치를 쥐었다.
사람이 내려왔다. 우주복을 입고 있었다. 우주복 밖으로 나온 손과 얼굴이 파랗게 빛나고 있었다. 손가락 하나 두께의 빛이 몸을 따라 돌고 있었다.
게이트의 파란 막과 같은 빛이었다. 처음 손을 넣었던 그것.
그 사람은 계단 아래에 서서 왼쪽 소매를 손목 위까지 걷었다. 적힌 글씨를 소리 내어 읽었다.
"티 십칠. 망치. 작게. 티 구백오십육. 폭탄. 크게. 내일. 두 사람. 물어볼 것 많음. 파란 거 먼저 설명할 것."
읽고 나서 우리를 봤다.
"저는 파랗습니다. 원래 그렇습니다. 놀라지 마세요. 저는 T999입니다. 어느 분이 망치예요?"
T17이 망치를 들어 보였다.
"그럼 당신이 폭탄이네요. 무거워요?"
"……네."
"들어 봐도 돼요?"
나는 폭탄을 내밀었다. T999는 왼손으로 받았다.
"왼손으로 들게요. 오른손은 돌에만 써서요."
폭탄이 T999의 손에서 아래로 처졌다. T999는 그것을 한참 봤다.
"무겁네요. 이 우주선에 무거운 게 있는 줄 몰랐어요."
폭탄을 돌려주고, T999는 왼손을 굽혔다. 손끝에서 뻗은 빛이 같은 손의 손목 위를 지나가며 글씨를 남겼다.
폭탄: 무거움.
잉크가 아니었다. 빛이었다. 몸을 따라 돌던 그 빛.
"이건 안 지워져요. 돌 깰 때랑 같아요. 그래요, 하면 남아요."
T17이 그제야 입을 열었다.
"야. 너 몇이야."
"백입니다."
T17이 도로 앉았다.
"……반칙이다. 신고할 데 없나."
"신고요?"
"아니야. 됐어."
"여기 적혀 있어요. 망치는 세는 사람이라고. 오늘 조명은 몇 번 깜빡였어요?"
T17이 나를 봤다. 그 눈빛은 나도 안다. 왜 쟤가 그걸 알지, 라는 눈빛이다.
"……둘."
"둘. 적어 둘게요."
"적지 마. 그건 내 거야."
"알겠습니다."
T999는 손끝을 뗐다. 정말로 안 적었다.
T17이 T999의 왼손을 잡아당겼다. 손바닥을 읽었다. 여섯 줄을 지나 맨 아래에서 멈췄다.
"이거 뭐야. 돌아오는지: 모름."
"모르는 거예요."
"뭘 몰라."
"돌아오는지요."
"……누가."
"우리요."
T17이 손을 놓았다.
"그거 D한테 물어봤어?"
"네. 대답 안 했어요. 대답 안 하는 것도 대답이라서 적었어요. 모름은 비밀이 아니니까 손에 적어도 돼요."
"D가 너한테는 대답을 해?"
"대부분요. 제가 어차피 잊어서요."
"그럼 우리가 갈 별에서 돌아온 사람이 있는지도 물어봤겠네."
"네."
"뭐래."
"그건 옷 안에 있어요."
"뭐?"
T999가 소매를 조금 걷고, 옷에 가려져 있던 팔 안쪽을 들여다봤다. 고개를 숙인 채 작게 중얼거렸다.
"이번에 갈 별. 지하에서 돌아온 사람…… 없음.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말 것."
소매를 도로 내린 T999가 T17을 봤다.
"이건 말씀드리면 안 돼요."
T17은 한참 T999를 봤다. 그리고 웃었다. 소리 없이.
"미치겠네. 이미 다 말했잖아, 그거."
"혼자 읽은 건데요."
"……그래. 혼자 읽었지."
"안 놀랐어요."
T999가 갑자기 계단 쪽을 보고 말했다. D가 서 있었다. 발소리는 없었다.
"세 번째 줄 덕분에요."
D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벽의 단면도 앞에 섰다. 서른한 층. 붉은 원.
"별에 내려갈 소형 우주선, 강하정은 선미의 출항 구역에 있어요. 여기서 연결 통로를 따라가면 돼요. 셋이 타면 자동으로 표면까지 내려가요. 저는 모선에 남아요."
"왜요?"
T999였다. 나도 T17도 묻지 않았을 것이다.
"저는 복원층에는 못 내려가요. 이름이 없어서요."
"D는 이름 아니에요?"
"아니에요."
"그럼 뭐예요?"
D는 조금 있다가 대답했다.
"……남은 거예요."
T999가 손목 위에 적었다. D: 이름 아님. 남은 것.
"그것도 적어?"
T17이 물었다.
"손에 적어도 되는 거예요. D가 안 된다고 안 했으니까."
D는 안 된다고 하지 않았다.
"표면에 내리면 입구가 있어요. 입구 바로 아래가 지하 1층이에요. 층마다 다음 층으로 갈 수 있는 입구가 어딘가에 반드시 있어요. 셋 중 누가 깨든 조각은 셋 모두에게 새겨져요. 기억이 사라지는 건 깬 사람뿐이에요. 그리고 아래에 오래 있으면 아무것도 안 깨도 기억이 조금씩 사라져요. 별이 잊어 가는 곳이니까요. 그러니까 빨리 내려가야 해요."
T17이 바로 말했다.
"그럼 내가 다 깨면 되잖아. 작게 깨니까 작게 나가고."
"당신 망치로 안 깨지는 돌이 있어요. 맨손으로만 깨지는 돌도 있고, 폭탄으로만 깨지는 돌도 있어요. 어느 층에 어떤 돌들이 있는지는 내려가 봐야 알아요."
"……그래서 셋이구나."
"그래서 셋이에요."
D가 나를 봤다.
"마지막 방에서 부르는 건 당신이에요. 98이 제일 온전히 닿아요."
"저는 안 돼요?"
T999가 물었다.
"백은 부르면 남는 게 없어요. 당신이 없어져요."
"알겠습니다."
T999는 이번에는 손바닥에 적었다. 여섯 줄 아래, 돌아오는지: 모름 바로 옆에.
부르지 말 것.
"이건 손에요. 제가 잊으면 안 되는 거니까요."
"출발은 한 시간 뒤예요."
D는 그렇게 말하고 계단을 올라갔다. 발소리 없이. T999가 그 뒷모습을 보고 작게 말했다.
"발소리, 진짜 없네요. 적혀 있어도 신기해요."
셋이 남았다.
T999가 나에게 물었다.
"이름이 뭘 것 같아요? 별 이름."
"모르겠어요."
"먹는 거였으면 좋겠어요. 큐브 말고 다른 거."
T17이 천장을 봤다.
"별 이름이 먹는 거면 어떡하냐."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머릿속 어딘가에 아직 아무것도 새겨져 있지 않은 자리가 있는 것 같았다.
그 자리가 조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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