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화이름의 벽
내 기억은 낡고 거대한 우주선 안에서 시작됐다.
하얀 옷을 입은 누군가가 유리 건너편에서 나를 보고 있었다.
"T956. 제 말이 이해된다면 왼쪽에 보이는 게이트를 통과하세요."
주위를 둘러보니 작은 방 안에는 나 혼자뿐이었다.
유리 너머의 목소리는 나를 향한 것이었다.
방 왼쪽 벽에 출입구가 있었다. 문 대신 투명한 파란 막이 드리워져 있었다. 그 너머로 넓은 바닥이 보였고, 조금 높은 곳에 사람들이 서 있었다.
'이쪽으로 나가라는 건가?'
손을 파란 막에 대 보았다. 아무런 저항 없이 손이 그 너머로 빠져나갔다.
게이트를 통과하는 순간 위에서 기계음이 들렸다.
"파워 98%. 개체 식별 완료."
기계음이 끝나자 위쪽에서 탄식과 말소리가 들렸다. 난간 너머의 사람들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너무 아깝네요."
"그래도 이 정도면 상당한 것 같은데요."
"환영합니다."
"신이시여."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환영하는 사람도 있었고, 무언가 아쉬운 표정을 짓는 사람도 있었다. 그중에는 울면서 주저앉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그들을 올려다봤다. 누군가는 내 얼굴을, 누군가는 게이트 위에 남은 숫자를 보고 있었다. 내게 말을 걸기보다는 서로 짧은 말을 주고받았다.
옆문이 열렸다. 유리 너머에서 게이트를 통과하라고 말했던 사람이 나왔다.
"당신의 이름은 T956입니다. 앞으로 지낼 곳으로 안내하겠습니다. 저는 D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D는 내 앞에 서서 위쪽을 향해 말했다.
"이제 방으로 안내할게요. 쉬게 해 주세요."
난간 너머에서 누군가 고개를 끄덕였다. 한 사람은 돌아섰고, 다른 사람들은 아직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손을 들어야 할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D가 복도 쪽으로 몸을 돌릴 때까지 그대로 서 있었다.
"T956."
D가 다시 나를 불렀다.
"따라오세요."
나는 말없이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
복도는 생각보다 길었다.
금속 벽을 따라 배관과 전선이 드러나 있었다. 천장에 줄지어 달린 흰색 조명 가운데 몇 개가 깜빡였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발밑에서 작은 진동이 느껴졌다.
우주선이 움직이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창문은 어디에도 없었다.
"여기가 어디죠?"
내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D가 걸음을 멈췄다.
"어디도 아니에요."
D는 뒤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우리는 어느 별에도 속해 있지 않아요."
그녀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나는 그 대답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복도 끝에서 D가 오른쪽으로 꺾어 들어가더니 멈춰 섰다.
벽이 이름으로 가득했다.
금속 벽면 전체에 바닥에서 천장까지 손톱만 한 글자들이 빼곡하게 새겨져 있었다.
수백. 아니, 수천 개. 어떤 글자는 깊고 단정하게 새겨져 있었고, 어떤 글자는 떨리는 손으로 급하게 긁어 놓은 것 같았다.
꺾어 들어간 복도는 끝이 보이지 않았고, 이름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
"이게 다 뭐죠?"
내 질문에 D가 대답했다.
"이름이에요. 이 우주선에 탔던 사람들의 이름."
"이렇게 많은 사람이 여기 있어요?"
"대부분은 다른 별에 있어요. 죽어 가는 별에 남아, 그곳 사람들이 잊어 가는 이름을 대신 불러 주고 있어요."
D는 벽에 손끝을 대지 않은 채, 허공에 글자를 그렸다. 오래 연습한 동작 같았다.
허공에 그려진 글자가 그대로 벽면에 새겨졌다.
T956. 내 이름이었다.
"복원자는 우주선에 탑승하는 날 자신의 이름을 부여받습니다. 그 이름은 여기에 기록됩니다."
"왜죠?"
"이렇게라도 기록하지 않으면 우리는 서로를 기억할 수 없어요."
D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지만, 말을 마친 뒤에도 내 이름이 새겨진 자리를 한동안 보고 있었다.
나는 벽을 다시 보았다. 내 이름 양옆에도 비슷한 글자와 숫자가 줄지어 있었다. 이 이름을 받은 사람들도 처음에는 여기에 서서 자기 이름을 보았을까.
잠시 말이 없던 그녀는 몸을 돌려 다른 복도로 향하며 말했다.
"여러 가지로 혼란스럽겠지만 일단 쉬세요. 방을 알려 드릴게요."
천장의 조명이 치직, 소리를 내며 잠시 깜빡였다.
다시 밝아졌을 때, 아까 글자가 있던 자리가 비어 보였다. 나는 눈을 깜빡이고 그쪽을 다시 봤다. 처음부터 빈자리였는지 자신이 없었다.
D는 벌써 복도 모퉁이에 가 있었다. 나는 서둘러 그녀를 따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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